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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양배우가 전시를 접하게 된 건 기사였습니다. 화가 되어서 전시를 한다는 소식에 '돌아왔구나' 하고 내심 반가웠습니다. 그가 연기에서 보여준 열정을 알기에 그의 그림이 궁금해졌고 그의 언어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책 <제4의 벽>을 짚어 들었습니다. 

 

출처 : 예스24


<김동훈 프롤로그>
작가는 인생에서  '봄'이라는 계절마다 새로운 '봄'이 가능했고 거기에 가슴에 '불'이 '떨어지는 체험'을 했다. 그것을 위해서 심오한 성찰의 여정이 필수적이었다. 작가의 말마따나 "나와 타자, 나와 세상, 그리고 삶과 죽음,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 아름다움과 추함,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인기를 끌거나 대중이 환호할 만한 희망 문구는 아니다.
이제 박 작가는 사명을 발견했다. 예술가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만의 "자신이 선택한 길" ,"힘들고 험난한 과정"을 침묵으로 지나야 한다. 더 이상 "쉬운 지름길"은 없다. 때로는 당나귀처럼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아프고 슬픈 존재다. 오롯이 자신이 본 세상을 표현하여 감동을 주면 그뿐이다. 그 경지에서는 "연극이든 그림이든 예술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 모두 같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연기는 그림이 되고 그림은 연기가 된다.

 

<김동훈 에필로그>
2차원의 평면에 제4의 벽을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기는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다. 박 작가는 그리기를 필생의 과업으로 택했다. 연기와 언어의 통념으로 재현의 통념을 공격하는 그의 작업은 구상과 추상의 융합, 말과 그림의 혼란으로 나타났다. 그림 속 박작가의 대상들은 한결같이 형태가 일그러져 있다. 그런데 신기하다. 캔버스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어떤 박진감이 도사리고 있다.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박 작가의 대담한 물감 활용, 이질적인 캔버스 도입, 그리고 신체와 붓의 움직임,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초강력 파워를 일으키는 자기장처럼 소용돌이친다. 작가를 휘어잡았던 그 동력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과 경험을 선사했다.

<박신양 에필로그>
배우로서 제4의 벽 안쪽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 왔지만 나는 사람으로서 제4의 벽 안에만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럴 이유가 없다. 제4의 벽이 만들어 낸, 그리고 나에게 영향을 미쳤던 여러 가지들 때문에 나는 제4의 벽을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제4의 벽이라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너무나 무궁무진하고 진귀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나는 사소하지만 분명한, 끈질기게 나를 붙잡는 그리움에 대해서 제4의 벽이라는 근거-경계를 인식하고, 거기에 서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중략) 그렇가. 나는 경계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경계에 대해 모호하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경계'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하고 싶었다. 물론 정확하게 발음한다고 해서 경계의 정체가 분명 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말과 글과 상관없는 채로 존재한다. 아니, 그것은 말이나 글보다 먼저 있었다. 아니, 애초부터 경계는 없었다. 하지만 나 같이 감각을 지켜봄을 통해서 본래 모습에 다가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경계를 애써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처 : 예스24



"당나귀는 짐을 지기 위해서 태어났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 삶의 여러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듯이, 나 또한 나만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 그런데 당나귀가 짐을 지고 있는 모습은 나보다 더 의연해 보인다. 짐을 지려고 태어난 인생 같아 안쓰러웠고, 그런 당나귀가 내 모습 같기도 했다. 내 짐이 특별히 무겁거나 대단하다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짐을 생각하게 된다. "

"어느덧 당나귀의 등은 굽어가고 딱딱해져 간다. 딱딱해질 때까지 피 나고 곪고 다시 새살이 돋고 파리들이 왱왱거렸다. 당나귀는 그것도 모른다. 자기가 아팠는지 딱딱해졌는지, 그가 꾸는 꿈처럼 처음 같은 색깔이고 처음 같은 피부 일 거라고 알고 있다.
당나귀가 헤치고 나아온 게 짐인지 세상인지 시간들인지 손가락들인지 파란 바다일지 새벽안개였는지 차가운 냉대들이었는지 모른다. 당나귀에겐 그저 꿈이 중요하다. 아니, 짐이 중요하다. 이젠 짐을 져서 꿈을 꾸는 건지, 꿈을 꾸기 위해서 짐을 져야 하는 건지, 그것도 모르겠다. 당나귀에겐 꿈도 짐이고 짐도 꿈이다 "
" 짐을 져야만 비로소 행복하다고 느껴서 바보스럽고 동화에 나오는 꿈들을 평생 꾸면 이루어질 거라고 믿어서 바보스럽다. 하지만 당나귀에게는 그게 진짜다."


* 당나귀의 발길질
(중략) 지름길을 가려는 자기 자신을 발견 할 때 드는 가책과 죄책감은 정말로 오랫동안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건 뼈아픈 일이다. 그래서 헛된 꿈은 꾸지 않는다. 헛된 꿈을 포기하는 순간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은 비교적 단순해진다. 진심인가, 진정인가, 불순물이 들어 있지는 않은가, 정말로 솔직한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길 뿐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나 자신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다른 말로 한다면 스스로 의심 없는 확신 속에 있게 될 때까지, 그러기 위해서 커다란 의심 질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그것이 부자연스럽지 않을 때까지 천천히 밀고 나아가야 한다.
쉬운 길과 지름길이라는 유혹 앞에서 스스로를 기만하면 결국 영원히 길을 잃게 된다. 그런 점에세 두 가지 선택이 앞에 있다면, 어려운 길은 쉬워 보이는 길에 비해서 항상 옳다. 쉬운 길을 선택한다면 모든 표현은 결국 허공에 맴돌게 된다. 그러니 가끔은 못된 성질에서 비롯되는 당나귀의 뒷발질을 허용하자. 그 정도는 허용하자.  

 

출처 : 예스24


* 감동의 힘
"그림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 그림은 화가로뿐 아니라 연기자로서도 나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그림은 그 자체로 나의 또 다른 자아다.
그래서 그리는 작업은 고통스럽지만 희망적이다. 나에게 그림과 연기는 끝없이 이어지는 상생하는 쌍곡선이다."


*모두 움직인다.

(중략)
그림이 어떻게 멈추고 정지돼 있을까? 움직이는 게 진짜고 진실 아닐까? 현실 어디에도 움직이지 않는 건 없으니까. 그리고 생명력의 본질은 정지함에 있지 않고 움직임에 있다. 정서가 움직이지 않는 연기를 박제된 연기 또는 다른 말로 죽음이라고 한다. 그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형태든 선이든 색이든 모두 움직이고 생명에 가득 찬 춤을 춰야 한다.
정확하는 건 뭘까? 편의상 눈에 보이거나 사진처럼 보이는 것을 정확성이라고 한다면 나에게 '정확성'이란 오히려 눈으로 볼 때가 아니라 눈을 감았을 때 더 선명해진다. 나에게 정확성이란 그렇게 오히려 눈의 현혹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더 뚜렷해진다.

연기할 때 나는 내가 느끼는 만큼만 표현했다. 올곧고 정확하게, 그림을 그리는 마음도 그렇다. 나의 진심만큼만 전달되리라는 심정으로, 연기든 그림이든,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던져 넣었을 때 비로소 보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가 닿는다고 믿는다.

박신양 배우는 연기에 대한 열정을 그림으로 옮긴 듯 그림을 통해 제4의 벽을 허물고자 합니다. 그가 말하는 그림은 '정적인 대상' 이 아니니다. '동적'인 대상이며 그리고 관객과 작가 사이에 감동으로 제4의 벽을 허물고자 합니다. 그의 당나귀 같은 진정성 있는 행보 응원합니다. 

 

* 굵은 글씨는 본문 내용의 일부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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