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
시인 김형술
시집 < 물고기가 온다> 중에서...
한밤중 어둠 속에 깨어 있는 건 굶주린 밤고양이만은 아니다. 누구에게 따귀를 맞은 듯 가위눌린 잠에서 걸어나오면 어디선가 혼신으로 앓고 있는 목소리
바람 일제히 닫힌 창문 쪽으로 불고 겨울 달빛 고드름으로 서 있는 골목길. 허술한 처마 아래 파아랗게 어둠을 응시하는 저 눈빛
제 안의 검은 말들을 태워, 제 몸속 차가운 눈물 줄기를 태워 한 줌 온기로 노곤한 집들의 잠을 지키는 저 조그만 몸 속 반짝이는 수많은 불의 씨앗들
길 잃은 신발의 꿈들 찬 달빛 비껴 잠재우고 어린 밤고양이 허기를 먼 별빛으로 들어 올린다. 허술히 버려진 집 한편에 숨어서 제 몸속 한기로 무딘 온기를 벼리는 저 형형한 눈빛들 꺼지지 않아
온밤 내 거친 잠 속의 불씨들 다독인다. 차가운 지붕을 어루만지며 지상으로 내려오는 순한 별빛들 받는다. 인적 드문 골목마다 일어서는 저 낮고 가열찬 심장의 박동소리
선홍빛. 꽃 내음 나는 새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지금은 아파트가 사는 세대가 많지만 단독주택에 살아본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겨울에 기름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를 돈이 타는 소리로 들리기도 하지만 그건 기름을 태워 온기를 만드는 따스함을 만드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의 표현에 감탄을 했습니다. '특히 3번째 문장 : 제 안의 검은 말들을 태워, 제 몸 속 차가운 눈물 줄기를 태워 한 줌 온기로 노곤한 집의 잠을 지키는 불의 씨앗들'이 내가 바라본 기름 보일러 배관에서 나는 연기였습니다. 시인의 시선은 참 상세하고 귀엽고 내 속의 잠을 깨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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