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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물화
'어떻게 서양 화법과 한국 정서를 조화시킬 수 있을까' 그가 주목한 건 조선의 얼굴이었다. 이쾌대는 인물화에 매달렸다. 서양화 기술을 익힌 이쾌대의 그림은 당시 조선 화가들의 인물화와 달랐다. 르네상스 당시 화가의 작품처럼 이쾌대가 그린 인물들은 선이 굵고, 선명하고, 정확하고 비장했다. 1)

 


* '무희의 휴식' (1937)
단장을 마치고 곧 있을 공연을 기다리는 듯한 무희를 그렸는데, 무희의 단단한 눈빛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결의가 느껴진다. 무희가 입고 있던 옷은 전통적인 궁중무복으로 복식에 대한 모사가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형태에 대한 이해, 인물을 둘러싼 분위기의 묘사, 조선의 전통을 다루는 방식 등에 이쾌대의 작품세계가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3)

 


* '운명' (1938)
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숨을 거두자 그를 둘러싼 네 명의 여인이 비탄에 잠긴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서양화 단골 주제인 예수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구조이다. 1)
남성은 무기력한 존재로 표현되어 있고, 주변의 여성은 적극적으로 슬퍼하거나 저항하거나 고민 하는 등 주체적인 인간으로 표현되어 있다. 화면 오른편을 가로지르는 방문 그리고 아래쪽 문틀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시점을 사용함으로 써 방안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푸른빛과 보라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죽음의 그림자와 같은 불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3)

 

*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0)
젊은 화가의 결연함이 들어 있다. 파란 두루마기를 입은 이쾌대가 부릅 뜬 눈으로 정면을 쳐다본다. 굵은 눈썹, 두꺼운 입술, 우람한 팔뚝을 가진 이 남자에게서 옮음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는 선비의 기개가 느껴진다. 등 뒤로는 평화로운 조선 산천이 펼쳐져 있다. 이쾌대의 손에는 서양식 팔레트와 동양의 붓이 들려 있다. 비록 서양화 기술을 터득했지만, 꿋꿋이 나의 민족을 그리겠다는 의지가 전해진다. 1)

 


* '군상 1 - 해방고지' (1948)
해방이라는 벅찬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떠올리게 하는 역동적인 그림이다. 그림 왼편엔 하얀 한복을 입은 여자가 맨발로 달려오며 광복 소식을 전하는 중이다. 그림 오른편에는 이 소식을 전해 듣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해방의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지만 밝지만은 않다. 오른쪽 화면 아래엔 시체들이 쌓여 있고, 누군가는 아직도 뒤엉커 싸우는 중이다. 저 멀리에선 여전히 포탄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기쁨과 공포가 섞여 있다. 그럼에도 그림 중앙에는 발가벗은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을 먹고 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새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1)

 


* '군상 4' (1948 추정)
오른쪽 밑에서 왼쪽 밑으로 이어지는 인물들의 유기적인 구성, 확고하고 자신있는 인체 묘사 등으로 다른 군상보다 진전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편에는 절망에 빠져 있거나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람들이 뒤엉켜 있지만 왼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보인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벌거벗고 있어서 극한 상황에 처란 인간의 실존성이 더 강하게 부각될 뿐 아니라 이쾌대의 뛰어난 인체 묘사력과 해부학적 지식의 약량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3)

2. 월북 미술가 : 좌파, 우파에게 이용당하고 역사에서 사라진 화가
좌익과 우익 양쪽 모두 이쾌대를 가만두지 않았다. 1949년 이승만 정부는 이쾌대를 강제로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보도연맹이란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키려는 취지로 만들어진 단체다. 보도연맹에 속한 이쾌대는 강제로 반공 포스터를 그림을 그려야 했다. 1년 후 6.25 전쟁이 터졌다. 어머니 병환 때문에 이쾌대는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이번엔 좌익이 이쾌대에게 사상 전향을 강요했다. 이쾌대는 살아남아야 했다. 그는 북한군 명령에 따라 다시 스탈린, 김일성 초상화를 그렸다.
전세를 역전됐고 연합군은 서울을 탈환했다. 그 사이 이쾌대는 좌익세력으로 분류됐고 국군에 체포돼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휴전협정후 포로들은 남한과 북한 중 어디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헸다. 이쾌대는 북한을 선택했다. 그렇게 이쾌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

 


3.전쟁 포로수용소에서도 후학을 가르치다.
이쾌대는 추위 속에서 천막을 짓고 포로수용소 만드는 일부터 동원되었다. 이 험악한 곳에서도 이쾌대가 저녁 시간을 쪼개한 일은 10대 화가 지망생을 위해 손수 인체 데생 교본을 제작한 것이다. 이주영 (1934-2008) 한 소년이 미술에 재능을 보이자 그를 위해 '미술 해부학'을 강의하고 기록한 노트이다. 총 40여 쪽에 달라는 이 노트는 인체의 균형과 골격, 근육, 동작 등 원리를 친절하게 그림과 함께 설명한 수준급 표본이었다. 종이도 귀했으니, 뼈와 근육의 이름과 역할, 움직임을 가르친 후, 땅에다 막대로 그려보게 하면서, 강의와 교재 제작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주영은 이 교재를 목숨처럼 지키며 포로수용소를 나온 후, 살아있는 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그의 사후 2010년에야 유족이 알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끝-


출처 :
1) 이쾌대,  좌파,우파에게 이용당하고 역사에서 사라진 화가 / 조성준 기자 / 매일 경제 / 2020-09-04
2) 한국의 미켈란젤로가 남긴 걸작, 눈 치켜뜬 여자아이가 보이나요? /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 조선일보 / 2022-02-20
3)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 아트 114 / 201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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