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영화에게 말을 걸다
내가 본 이창동의 영화는 "나의 고통을 보여줄테니 옆에 있으라"고 말한다.
이창동의 영화는 한 인물을 크게 보여준 뒤 인물의 감정을 상영시간 내내 끌고 다니다 탈진시켜 버린다. 차라리 동감 할 수 있도록 사건을 직접적이고 핵심적으로 보여주면 좋겠지만 그리 친절한 감독도 아니다. 관객이 등장 인물에게 동일시 되기 보다는 주변의 인물이 되어 이 사람이 감정이 어떻지 흘러가는지 지켜보게 한다. 이는 한 개인의 고통을 본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해할수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옆에서 있으라 말한다.
이게 무슨 법인가. 지켜보라니. 그것이 이 세대를 함께 하는 우리의 몫이라 이야기하는 것 같다. 괴로움을 말하는 감독이지만 영화 말미에는 햇빛과 같은 희망을 말한다. 이는 감정이 바닥을 치고 현실을 직시할 때 완성된 본인으로 써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이창동 감독에게 말을 걸어본다.
이창동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그의 경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질문:살면서 그런 희망을 본 적이 있나.
=많지만 제일 선명한 게 있다. 철거민 판자촌에 살던 스무살 때 재수도 실패해서 아버지한테서 쫓겨났다. 섣달 그믐밤이었다. 죽으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복수하려고 했다. 자살만큼 좋은 복수는 없다. 그래도 그냥 죽을 순 없었다. 내 문학적 재능을 몽땅 쏟아부은 위대한 유서를 남길 생각이었다. 내 죽음을 모두 통탄해야 하니까. 친구에게 5천원 빌려서 신경안정제, 수면제 한 봉지와 볼펜과 종이를 샀다. 여관마다 방이 없어 산동네 여인숙 문간방에 들었다. 문제는 유서를 쓰려고 펜을 들었는데, 명작은커녕 첫줄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슨 마음에선지 그 방에 새한테 약을 먹여 죽었다. 죽은 새 보니까, 죽음이 실감났다. 새벽에 도망나왔다. 그때 하늘의 별을 봤다. 심리적으로 자살을 경험한 뒤에 본 별은 너무 찬란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막 밀려 올라왔다. 그런 느낌으로 살고 싶었다. 내 스무살은 춥고 배고팠지만, 그래도 밑바닥엔 눈부신 게 있었다. 지금은 그 위에 너무 많은 게 쌓여버렸다.
인물을 바닥까지 끌고 가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창동의 기법. 이창동의 경험과 닮아 있다.
1.<초록물고기>
<초록물고기>를 통해 이창동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건 막동이의 정체성 상실 즉 개발논리에 사라진 젊은이들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급격한 도시의 개발로 인한 젊은이들은 공간과 삶의 혼란을 겪으면서 방황한다. 자신을 상실한 이들은 보여주는 모습은 위태롭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신도시 일산이다. 개발 논리에 밀려 개인의 삶도 가족의 삶도 떠다니는 유령과 같이 되어버렸다.
정체성의 상실은 막동이를 통해 자세히 볼 수 있다. <초록 물고기>에서 막동이가 거울을 보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자기가 자기를 누군지 모르는 감정을 보여준다.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공간. 중심보다는 외형 확대가 우선이 시대속에서 막동이는 자꾸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며 흔들린다. 막동이의 정체성의 모습은 그가 사랑하는 여인 미애를 통해 선명해 진다. 첫만남은 장밋빛 스카프 였지만 차츰 그녀를 알아 갈수록 초라한 자신과 비슷한 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가족에 있어서도 정체성을 상실은 여실히 드러난다.
진짜 가족과 가짜 가족(조폭)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을 통해 사라져가는 가족의 정체성을 이야기한다. 진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짜 가족의 일원이 되었지만 가짜 가족의 냉혹함 앞에 막동이의 인생은 파괴된다. 마지막에 진짜 가족들이 모여 화해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정작 본인이 없는 가족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생각된다. 가해자인 가짜 가족(조폭)과 닭을 잡으며 행복한 한때는 보내는 진짜 가족들. 가족들은 자신의 평화가 어떤 댓가를 치루고 얻은 대가인지 무관심하게 일상을 살아간다.
2, <박하사탕>
<박하사탕>은 한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있는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한 개인이 정치나 역사 같은 사회현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외부의 힘에 의해 인간의 숭고한 영혼이 완전히 파괴될 수는 없다. 영혼의 고결성을 지키는 것은 개인이 책임져야 할 몫이다. 광주항쟁, 전경의 진압, IMF 등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한 전형적인 사건이다.
시대 흐름에 자유로울 순 없지만 시간을 역행하여 보여줌으로써 한 개인의 삶은 선택으로 만들어졌음을 나타내다. 시간은 삶에 있어 선택을 필요로 하고 거꾸로 흐름으로써 결과의 원인을 보여준다.
"영호가 광주사태 때 오발로 한 여학생을 실수로 죽였잖아요. 그걸 참회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영호는 자기 손에 피가 묻었기 때문에 그 줄에 서 버렸다고요. 그게 사실 영호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말하면 보편적 한국인의 선택이었어요. 광주사태가 일어난 후에 광주가 누굴 선택했느냐 하면 전두환을 선택했어요. 그런데 그런 선택을 다시 반복하지 않고 시간을 되돌리는 것을 적어도 관객은 할 수 있죠"
감독의 인터뷰에서 처럼 영호의 삶이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순 없지만 영호의 선택의 결과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그리고 이창동 감독은 <박하사탕>에서 노동하는 손의 고귀함을 말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손을 쓰기 때문이다. 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달라진다. 80년대를 돌이켜보면, 적어도 노동하는 손이 착한 손이라는 관념은 있었다. 그게 완전히 무너졌다. 내가 살아온 20년을 돌이켜볼 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이거다.”
수소문을 거듭해 찾아온 순임과 마주앉은 초보형사 김영호. 서투른 첫고문으로 피의자의 똥을 뒤집어쓴 손을 씻고 있을 때, 하필이면 찾아온 첫사랑. “꼭 딴사람처럼 느껴졌는데 손을 보니까 영호씨 같네요… 뭉툭하지만 참 착해보이는 손….” 그 앞에서 김영호는 음산한 미소를 띠며 더러운 손을 들어올린다.
계획한 미래와의 다른 인생을 인생을 살고 있지만 본인이 느끼기에 영호씨의 손이 여전히 착하다는 순임의 말. 그 말에 음산한 미소를 지으면 더러운 손을 들어올리는 영호는 자신안의 순수성의 파괴를 선택했음을 보여주면 이창동이 말하는 착한 손의 관념은 이데올로기의 안에서 파괴되어 더이상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3. <오아시스>
전과자인 종두와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의 사랑이야기.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이지만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 낯선 이들이고 불편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 둘의 사랑은 현실이라고 해도 우리에겐 오아시스 그림처럼 판타지로 다가온다.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적 판타지로 만들고 싶었다는 이창동 감독의 말은 이 장면에서 나타난다.
" <오아시스>에 주인공 종두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영화 촬영차와 조우하는 장면이 있지. '헤, 실제로 보니까 별 거 아니네.' 낄낄거리면서 종두는 오토바이로 열심히 영화 촬영 차를 쫓지. 내가 좀 오버한 거지만 그래도 그 장면을 넣고 싶었어. 영화가 주는 판타지가 사실 별 거 아니지 않나. 난 이 영화에서 현실과 비슷한 판타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구."
영화와 현실이 주는 차이가 별거 아님을 이 장면을 통해 말한다.
'오아시스'에서 드러나는 갈등은 종두와 공주사이의 감정의 사이안에 있지 않다. 종두와 공의 사랑은 사회밖에서 충돌하며 사회의 차갑고 편향된 현실을 끝임없이 드러내고, 그렇게 인정받지 못하는 그들의 사랑은 사랑에 대한 감정적인 애뜻함을 끌어내는 대신 사회에 대한 (그러나 실상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인) 분노를 이끌어낸다. 남녀사이에 가장 긴밀하고 사적인 때인 섹스의 순간마저 침범당하는 부당함. 시누이가 비명을 지르지만 이 비명은 오히려 우리들의 분노를 닮았다.
마지막에 날리는 먼지는 햇빛을 통해서 보이는 존재이다. 우리의 햇빛속에 먼지가 있음을 알려주는 장면익기도 하다. 그 먼지가 안타깝지만 종두와 공주를 닮아 있다.
4. <밀양>
<밀양>은 유괴도 신앙도 광기도 언급하지만 어느 것도 영화를 관통하지 못한다. 영화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라는 단 한마디가 불가능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아이를 잃은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이 무슨 사건에서 비롯된 고통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또 나는 고통이란 자기가 경험하는 것까지만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게 인간관계의 모순이다. 그리고 어떤 고통의 경우에는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게 있다. 인간의 논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거다. 이 영화에서 신애가 당한 고통이 그런 고통이지. 그때는 가해자 자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를 미워해봐야, 다시 말해 인간의 논리로 미워해봐야 고통만 깊어질 뿐이라고. 거기서 구원을 얻든지, 아니면 고통을 치유받든지, 어쨌건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야만 한다.
신애가 밀양에 내려와 유괴로 아들을 잃고 고통하는 장면. 그 장면을 고통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신앙과 광기를 표출하면서 극복할 수 있다고 언급하지만 이 또한 치유되지 못한다.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해할수 없고. 고통을 직시함으로 서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쉽게 고통을 동감하고 그때 그때 소비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현대 사람들에게 이창동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보여줌으로 써 인간에 대한 한계와 더불어 감정의 동감은 쉽게 느낄수 없는 것이며 이 또한 모두가 겪을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5. <시>
인터뷰에서 이창동은 “시란 무엇이냐는 질문은 모든 예술은 무엇이냐 하는 질문하고도 같다. 영화가 뭘 할 수 있는지, 우리는 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 묻는 질문과도 같다. 영화에는 시를 쓰는 사람이 나오지만 나에게는 영화를 만드는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한다.
이창동이 말하는 <시>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시란 추한 곳에서 아름다운을 찾는 것이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시라는 특정 한 장르에 매몰되지 않고 영화라는 장르와 동일시 된다.
시가 추한 곳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는 다는 것에 관해 영화 안에서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퍽퍽한 현실 속에서 미자는 시를 배우려 다닌다. 미자에게 시는 현실 망각을 위해 필요하며 삶의 아름다움을 찾는 다는 측면으로소개된다. . 그러나 시를 쓰면 쓸수록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는 미자.
우연히 자살한 여중생의 원인을 찾던 중에 손자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여중생이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지독한 현실 계속되는 와중에 '시'라는 문학는 현실 도피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주인공 미자가 밭에 있는 피해자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알츠하이머병 때문에 할 말을 잊기도 했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낀 시심 때문에 자기의 현실을 망각하기도 했다. 시는 망각하기 쉬운 존재임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금요 낭송회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시는 현실과 떨어져 있고 그들은 그들만의 이야기를 한다. 그 와중에 젊은 시인의 "시는 죽어도 싸"라는 대사는 현실를 말하지 못하는 시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그녀, 미자(美子)는 끝끝내 부도덕의 세계에 묶여 있지 못하고 아름다움과 도덕 사이에서 꺽꺽 울음을 터뜨린다. 낭송회 뒷풀이 도중 마당으로 나가 처연하게 우는 미자의 모습에 음담패설을 즐기는 형사가 묻는다. “누님, 왜 우세요. 시가 안 써져서 우세요?” 시는 꽃을 보고 쓰는 것만이 아님을 그녀가 깨닫는 순간 시는 드디어 완성된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시를 완성하는 미자를 보면서 진정한 시는 추한 현실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창동을 영화<시>를 통해 영화가 현실망각을 위해 필요하지만 망각을 위해서만 쓴다면 진정한 영화를 만들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현실을 직시해야 영화를 완성할수 있다고 이창동의 다섯 번째 영화는 자신이 영화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자전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총론>
이창동 그가 특별한 이유
영화와 소설이 다른 이유
<박하사탕>의 영화문법은 소설로서는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영화는 시간의 매체이다. 영화 러닝타임이 주는 시간을 관객이 경험한다. 그 경험의 질, 과정을 소설로 대체할 수는 없다. <오아시스>는 좀 차원이 다르다. 핵심적인 것은 여주인공 공주가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뇌성마비 장애인의 겉모습이 추하니까 보기 불편하다. 그건 문자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문자로 풀어버리면 사람들이 모두 연민을 갖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맞닥뜨려서 아주 가까이서 얼굴 맞대고 보는 듯이 보면 그 불편함을 관객이 체험하게 된다. 그 체험을 겪고 난 뒤에 그 인물을 받아들이든지, 그 인물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든지, 그 인물이 나와 똑같은 인물인 것처럼 끌어안을 수 있든지 할텐데, 그 과정은 소설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창동은 소설로는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를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로 이야기 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라는 방법을 통해 관객과 소통한다. 약간은 어렵고 불편하지만 계속 말을 거는 그가 있어 세상을 받아들이는데 수월하게 다가온다.
인물에 집중하는 이유에 대해.
월간지 <스크린>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한국영화에서 너무 인물이 안 보인다. 인물의 매력, 삶, 감정 등이 관객에게 전달될 틈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서 인물을 강조하고 싶었다. 왜곡된 인물이 아닌 진짜 삶에서 부딪히는 그런 인물을.”
스토리, 인물간의 갈등속에 매몰된 한국영화 속에서 인물을 이야기 하는 그의 말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가능하지 않을 까 생각이 든다. 영화로서의 접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접근 그가 인물에 집중하는 이유가 아닐까.
<후기>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정리하면서 너무 어려웠다. 이번 글이 나만의 궤변일지도 모르지만 이창동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내가 본 당신의 영화가 어땠는지 이야기 하고 싶었고 이런 관객과 소통하는게 그가 소개해준 인물의 고통을 함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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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특별기획] 이창동을 만나다/ 첫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허문영기자
꽃보다 아름다운 이창동-
[씨네서울2000.3]초록물고기 박하사탕 감독 이창동 인터뷰(1~4)
이창동 vs 조선희, <오아시스>를 말하다
<박하사탕>의 이창동 "시간의 가치를 일깨우고 싶었다"
1999년 이창동 감독 마라톤 인터뷰
난 진담을 하는 거요, 지금. 재미있지 않아요? - 이준구 기자
<만남>영화제에서 만난 '초록물고기'와 이창동 감독 - 전진수 자유기고가
[오아시스] 빛으로 날리는 비둘기
박하사탕 먹고 초록 물고기 잡고
연극, 소설, 그리고 조용히 다가온 영화
주간이슈 일요판신문 - 중앙선데이] 흔히 이창동의 영화는 ‘지독하다’고 한다. 그토록 지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창동의 <밀양> ② 이창동 감독, 영화평론가 허문영 대담
허문영, 이창동 감독의 신작 <밀양>을 보고, 만나고, 쓰다
부메랑 인터뷰] 이창동 감독이 파놓은 깊은 우물 - 이동진 닷컴
[부메랑 인터뷰] 감독 이창동이 작가 이창동과 다른 점- 이동진 닷컴
<인터뷰>「박하사탕」의 이창동 감독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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